지상의 모든 것은 번영과 쇠퇴의 과정을 겪는다. 모든 생물은 그 존재의 의미를 추구한다. 꿈이 없다면 ‘삶’은 ‘죽음’과 다를바없다. 사암은 지금까지 그 활동이 계속되어 온 것처럼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살아있음’은 꿈을 향한 부단한 정열을 의미한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사암의 축적된 경험들은 바로 사암의 역사이다. 


1. 국제 협력

사암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 당시 전국적 조직을 가진 文學硏究討論 서클인 思巖會에서 시작하였다. 국내외의 문학작품을 주로 읽고 토론하던 사암회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정부는 대학생의 모든 모임과 조직을 등록하도록 강제하였고 비합법적인 조직의 활동은 금지하였다. 그리하여 대학이 모든 서클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가거나 해체되고, 어용적 모임으로 바뀌기도 했다. 당시 연세대 영문과 3학년이였던 이현화(T.S.S 초대회장)씨는 사암회를 “Thinking Rocks’ Society”로 개칭하면서 1965년 10월 첫번째 금요일 미국문화원(A.C.C)에 등록하였다. 이 당시 미문화원에 등록한 서클은 15개였으며, 92년 현재를 기준으로 梨大에 등록되어 있던 영어토론 연합서클(E.C.C, Pioneer, Tiger 등)과 카톨릭 여학생회관의 서클들(Centry, Orient, P.T.C, UNSC, KASA 등)이 바로 그들이다. 미문화원 등록의 조건은 영어회화 서클일 것과 Adviser로 미문화원의 미국인을 조직 내에 포함시킬 것이었다. 그 이유는 미문화원이 학생활동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학생 그룹들과의 관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현화 초대 회장은 서클 motto를 “This society is organised for the promotion of friendship, goodwill and international cooperation by university students”로 바꾸고 이화여대 영문과와 연합으로 T.S.S.를 시작하게 되었고, 첫 번째 Adviser로서 미군 대령 Reefe씨를 영입하였다. 매주 금요일 오후 6:00부터 7:30까지 1시간 반 동안 영어회화와 토론을 하면서 서클의 조직 활동을 확대시켜 나갔다. 1968년 6대 박종섭 회장은 서클명을 “Thinking Stones’ Society”로 주간지를 “Thinking Stones”로 바꾸었다.(후에 8대 남학우 회장에 가서는 주간지는 “The Sapience”로 개칭되었다.)

  많은 선배들이 미문화원의 등록은 학생들의 활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한 방책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클 멤버들은 미문화원의 NASA-K(미문화원 산하 서클들의 연합모임)에 들어갔을 때의 상황과 그 이유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너무 쉽게 미문화원에 적응했으며 그들은 오히려 세계주의자가 되어감으로써 그 당시 암울했던 시대 상황과 대학생의 위치를 벗어나기도 했다. 그 첫번째가 미문화원 행사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였다. ‘국제 협력’이라는 이름아래 1968년 7대 회장 이대식씨는 헌법을 발표하고 첫번째 Consolatory Visit to 203 MASH(미군 위안 방문)을 가졌다. 그 후 이 행사는 10회까지 계속되면서 서클 멤버들에게 親미국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데올로기를 심어 놓았다. 매 정기모임 때는 미국인 Adviser가 참관하면서 모임 중간에 Lecture를 하기도 했는데 “American Student life in college”(126회 정기 모임 때 Mr. buck의 lecture), “Americans in Korea” (168회 정기 모임때 Mr. Warner Convick) 등 이다. 이같이 서클사람들은 물질적 지원(예를 들면 그들은 미문화원 내에 서클방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방 이름은 Jefferson Room이었다)을 위하여 젊음의 이상을 바꾼 것이다. 그들은 미국 문화원의 목적을 파악하지 못했다. 박정권이 재야, 야당, 학생, 그리고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며 전태일이 분신하고 있을 때 서클인들은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서클 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적진 않았다. 1972년 유신 체제가 등장하면서 그러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고 서클멤버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부로부터의 자기 비판과 자각이 서클활동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먼저 영어 회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던 정기 모임은 영어 토론으로 바뀌어 갔으며 내용도 현실적인 주제가 많아졌다. 73년 203 MASH 방문을 폐지하였고, 67년 당시 1학년이었던 안관석씨의 소개로 처음 시작하였던 경기도 안성 신생보육원 방문은 그 후 크게 강화되어 ‘Work Camp'(현재 실시되고 있는 여름 Camp의 전신)라 하여 8박9일 하기봉사로 7회를 실시하였다. 토론강화를 위해 Key Note(현재 ‘생각하는 돌’의 토론에 관한 소개 부분)가 강화되었고 ‘야외 교양 강좌’라 하여 1박 2일 동안 토의 형식 연습과 주제 토론을 연습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 서클의 성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것은 곧 정신적인 발전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1974년부터 선포된 대통령 긴급조치는 이러한 서클 활동조차도 불가능하게 하였다. 74년 8월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등에 이어 75년 학 생 데모로 전국 대학이 휴교한 상태에서 1976년 8월 미국문화원은 미국 정보부로 바뀌고, 학생운동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원래와 달라진 NASA-K는 더 이상 미국 정보부의 관심을 끌 수 없었으며 지원조차 끊기게 되자 서클 사암은 가시밭길로 들어섰다. 23대 서준교 회장은 1978년 9월 27기의 Workshop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6기부터 12기까지가 T.S.S.의 성장기였고, 안정기는 번영기와 정체기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23기부터 T.S.S.는 고난과 방랑기를 경험하였다.”

2. 수난과 각성

미국 정보부로부터 NASA-K의 분리는 서클 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NASA-K에 속한 서클들은 미국 정보부로부터 모임방을 제공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임방은 빈번히 바꿔졌으며 모든 서클 활동은 각각의 서클 회원에 의해 재정을 꾸려 나가야만 했다. NASA-K와 그에 속한 회원들은 후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것은 NASA-K의 합법적인 기반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미국 문화원의 도움으로 자라온 서클은 그러한 어려움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Regular Meeting(정규모임)을 갖기 위해선 모임방을 찾아 야만 했다. (그 당시 Extra Meeting은 없었다. 그래서 Regular meetig하는 날에 모든 알림이 이루어졌다. 80년 5월과 6월의 정규모임 일지를 보면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지역별로 정규모임을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멤버들의 집-에서 가졌다. 영동 1조, 2조, 서대문조, 강남구조 등 8개 지역으로 나누어 토론했으며 그 시간은 5~6시간씩 되었다.) 주간 인쇄물을 펴내기 위해서 타자기 인쇄소를 찾아야만 했다. 그런 어려운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T.S.S.의 회원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참여하는 회원들조차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가득 메운 회원들과 함께 모임을 해 보았던 T.S.S. 리더들은 몇몇 사람들만이 썰렁한 방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아픔을 느꼈다. 그들은 방이 가득차게 서클 노래를 불렀다. 한 회원이 key-note를 쓰고, 타이핑을 하고, Sapience를 펴내고, 그리고 모자라는 비용을 충당했다.

  점차 그들은 급격한 퇴보의 이유와 복구의 방법을 분석하였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고민하지 않는 이들의 서클 의식의 결여였다. 그들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협력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그들이 서클 활동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함께 공유하지 않는 한 서클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희의적인 생각으로는 재건을 위한 탄탄한 토대를 쌓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각성과 더불어, 외부의 사회적 모순은 아카데미즘의 탄생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유신 체제의 폐쇄된 사회에서 자유로운 정신으로 가득찬 젊은이가 현실살이에 대해 만족스런 생각을 하기란 실로 어려운 것이었다. 내재적인, 그리고 외재적인 고충은 우리의 선배, 생각하는 돌들을 번민케 했다

  마침내 그들은 서클활동의 근본적인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과거의 습관화된 양식은 모두 폐지되어야 했다. 서클 활동에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가치가 세워져야 했다. 서클은 대학과 사회에 무관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24대 신동호 회장은 아카데미즘을 모토로 할 것을 공언하였고, 그것은 우리의 서클 역사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다. 여기에서 김동영 회장의 증언을 듣는다. “미문화원으로부터 NASA-K가 분리된 후, 우리는 당황했다. 회원들을 모으기가 더 어려웠다. 침체된 상황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이유는 방향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도무지 변혁을 해보려 하지 않았다. 많은 유능한 회원들이 있었지만 서로에게 무관심했다. 자연히 서클은 더 발전할 수 없었고, 침체되기 시작했다.”


3. Academism의 탄생 

“Academism”은 연구하고 탐구하는 태도를 존중하는 분위기를 의미한다.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견문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인격 함양과 자아실현에 있어 큰 도움을 준다.

  처음 Academism의 개념은 생소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Academism은 단지 소수 회원들의 것이었고 김동윤씨는 삼호원 Workshop에서 “지도자들은 Academism을 주장하지만 회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Academism을 향한 몇몇 지도적 Group들의 열정과 노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기존의 “Staff Meeting”을 없애고 그것을 “Extra Meeting”으로 대체시켰다. 그들은 Extra Meeting때 주제에 대한 예비 토론을 시작했다. 매주 생각하는 돌들은 적어도 한 권내지 그 이상의 책을 읽어야만 했다. 준비없이 모임에 참석한 회원들은 심하게 비판받았다. 그들은 말하기를 서클은 결코 멍청한 남녀의 단순한 모임일 수 없다고 했다. 우리 대학생은 우리 사회와 민족의 삶과 운명을 공유해야만 했다. 비록 서클의 이런 관점에 대해선 얼마의 반대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회원들은 Academism의 이념을 곧 받아들이고 따랐다. 신동호, 박종영씨와 그 후의 지도자들은 T.S.S.의 현재와 미래의 최상의 지표로서 Academism을 주장했다. 이러한 노력은 진실로 감명깊은 것이었다. 27기 이경애 부회장은 T.S.S.에 입회한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1학년이었을 때 누군가 내게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대학 생활의 한 부분으로서 서클활동에 참여해 보는 것이 좋았다고 했다. 난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 선배는 분명하게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 선배의 자신감은 서클 활동을 하는 것이 아주 좋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내가 T.S.S.에 들어온 이유는 그 선배의 그런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선배의 자신감은 내게 서클 활동 속에서 찾을 만한 귀중한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 것이었다.”

  Academism의 발전은 현저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계속되었다. Thinking Stones가 모이는 모든 곳에서 그들은 Academism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고 오래지 않아 Academism은 온 회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Academism의 개념은 재정립되었고 심오해졌으며 심지어 서클 이데올로기라고까지 불리웠다. 이기호씨는 그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처음부터 T.S.S.의 추구하는 바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서클 안에서 누릴만한 즐거움은 내게 있어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과 대화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전히 내가 서클 생활을 하 는 이유의 하나이다. T.S.S.의 추구하는 바는 나의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지금 Academism은 내게 있어서 매우 친숙한 것이고 다른 회원들도 이 서클의 목적을 추구하는데 나와 함께 하길 바란다. 몇 개의 특별행사들 후에 나는 T.S.S.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형성할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 선배님과의 대화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대화를 만족하게 여겼다. 때때로 난 내가 나의 후배에게 그런 재미있고 진실한 인상을 주며 내 앞에 있는 선배들과 같은 선배가 될 수 있을지 자문해 본다.”

4. Academism의 발전과 개헌

마침내 그들은 1980년 3월 4일 헌법을 개정하기에 이른다. “This Society is Organized for the Pursuit of Academism and the Promotion of Friendship through the English Discussion by the University Students”라는 서클목적을 내세움으로써 과거의 양식은 모두 폐지되고 새로운 의식과 새로운 가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신동호씨는 서클 활동에 관한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클 활동에 있어서 그 당시 주체들의 정신의 발달이 가장 본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클에 속해있는 가치와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은 가시적 활동과정이 아니라 주체 내부로부터 나온다. 서클은 서로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고 서로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을때만이 진정한 가치가 자발성과 추진력을 획득할 수 있다.”

  Academism.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 인간해방, 현실인식, 역사의식이라는 다섯 항목을 목적으로 하고 학습하고 탐구하는 진지한 태도를 서클에 자리잡게 하였다. 그들은 Academism의 목적과 그에 따른 자신들의 활동을 이렇게 주장한다. “국가는 우리가 하나가 될 때만이 존재하고 이 하나는 역사를 창조하고 발전시킨다. 민족주의, 민주주의와 남북통일,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민중의 염원을 실현하는 것은 양도될 수 없는 권리이자 의무이며 더 나아가 역사의 자연스러운 진행과정이다. 역사의 주체적 참여는 우리의 삶 그 자체이다. 고뇌와 고통의 종결은 오직 현실과 실천의 정확한 인식을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자유, 평등, 정의의 삶을 습관화함으로써 우리 자신들을 훈련시켜야만 한다. 세상 사람들이 침 묵을 지킬 때, 우리들은 일어나 외쳐야 한다. 진실은 하나이다. 우리가 그 역사의 수레바퀴 의 추진력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에 의해 압도당할 것이다. 사회적 삶은 개인의 삶 그 이상이다.”

5. 영어 폐지와 사암 

“아니.. 헌법 어디에 현실이 있습니까?” – 1989년 48기 여름 lecture 때 79학번 류세종 선배의 Academism 설명 중 88학번 임인영씨가 갑자기 일어나면서

“Academism은 종교이다. 그러나 아미타불만 외면 극락왕생한다는 그런 단순화된 종교가 아니다. 인간 소망의 현실화란 점에서 아카데미즘은 종교이지만, 그 종교는 소망을 현실화 할 수 있는 방법론적 인식을 갖춘 종교이다.” – 50기 소리모아 9집 83학번 유승준 선배의 “Academism론” 중

“만약에 우리가 모두 아카데미즘이라는 것에 일치할 수 있다면 영어는 폐지되어야만 합니다. 영어는 수단인데, 그것이 인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목표를 위해 수단이 바뀌어야 합니다.” – 1990년 6월 1일 staff 좌담회 중 89학번 배소희

“T.S.S.의 아카데미즘은 자본주의 사회과학의 허위와 억압성을 폭로하고 민중의 이념과 의식을 창출하고, 대중화하는 것이다.” – 51기 L.T Lecture 86학번 이성엽 선배의 “T.S.S.의 정체성 위기의 극복” 중

“선배라고 다 완전하지 않으며 전통이나 제도라고 다 비판없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읽는 책이 바뀌어야 하듯이 현실이 바뀌고 의식이 성숙하면 거기에 맞게 제도를 바꿔야 한다. 물론 영어가 모임의 제일의 문제이냐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논의를 하는데 조차 방해가 되는 것이 영어다.” – 1991년 3월 소리모아 13집 82학번 이주식 선배의 “모임과 영어”중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T.S.S.는 우리가 알고 있는 T.S.S.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서클이 될 것이다. 어떤 선배도 바뀐 서클에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 1990년 말 개혁 논쟁시 84학번 이련주 선배

  1980년의 헌법개정 이후 서클 T.S.S.의 모습과 방향성은 그 당시 선배들이 의도하려 했던 방향성과 일치했던 것 같다. 그들은 고민하는 대학생으로서, 참여하는 지성인으로서의 기본 적 소양인 사회와 현실에 대한 관심과 학습을 서클을 통해 실현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Academism을 주창했던 24대 회장인 신동호 선배는 영어를 통해 그것을 달성하고자 했으며 그 후의 멤버들도 그 뜻을 계속적으로 지켜나가길 바랬다. 한동안 서클의 영어는 별 문제점 을 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은 극복의 대상이었지 회피나 제거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의 이러한 노력은 사회과학토론의 강화와 학술적 프로그램의 전환에서 잘 나타날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즘의 성격과 개념의 확대에서 오는 멤버들의 의식의 변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중요성과 아카데미즘의 접근은 서서히 영어라는 의사 소통의 장벽을 느끼게 했으며 그것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였다. 문제는 서클 역사에서 오는 영어라는 전통을 청산하지 못한 80년의 헌법 개정서부터, 아카데미즘과 영어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그리고 영어와 사회과학을 동시에 하는 서클의 성격문제까지 파고들게 되었다. 해결은 극단적인 방법만 남겨놓고 있었다. 영어를 하느냐 안 하느냐. 그러나, 그 당시 – 그리고 1991년 겨울까지 – 아무도 영어가 없어지리라곤 생각못했으며 또 대부분 서클 성격상, 멤버 성향상 그리 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미 87년부터 시작된 조그마한 변화들은 결국엔 커다란 개혁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으로 나아갈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한 발판의 두가지는 첫째가 치열한 아카데미즘의 개념 논쟁이었고 둘째가 사회과학적 의식수준을 높이려 했던 선배들의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심도 깊은 토론을 위해 예비모임을 만들었으며 사회자모임도 필요하면 가지곤 했다. 주간지엔 key-note라 하여 토론내용을 정리하고 문제 제기를 하였고, 체계적 커리를 위해 Academism Committee(학술부)를 만들었다. Workshop 과 캠프를 통해 아카데미즘을 이야기했으며 세미나와 스터디를 통해 그들의 의식을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상황은 그때까지 서클의 핵심적 역할을 해온 영어의 입지를 좁히게 되는 결 과를 초래하기 시작했다.

1987년 45기 회장 유종은 씨는 8차 헌법 개정을 통해 그때까지 영어로만 토론하던 정규 모임의 출석만을 인정했던 정규멤버와 선거권을 우리말 토론인 예비모임의 출석까지도 확대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헌법에 제시하였다. 당시 1학년이던 87학번은 서클에서 학년별 토론을 들고 나옴으로써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체계적 커리 공부를 원하고, 효율적 의사소통을 바랬던 그들은 조금씩 서클의 변화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1988년 46기 여름 Sapience 특대호가 한.영 혼용으로 나옴으로써 실험적 한글사용의 시도는 또 다시 파문을 일으킨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도는 47기 박찬호 회장의 선거 공약에서 한글 팜플렛의 발간을 이루어 내는 토대가 되었다. 사회과학의 심도 깊은 내용을 담기 위해 발행된 한글 팜플렛은 영어로 발행되는 주간지인 Sapience와 이분적 체계를 이루는 상황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드디어 “소리모아”라는 한글팜플렛이 발행되면서 영어와 사회과학은 점점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우리말을 사용하는 예비모임과 소리모아의 질적인 향상을 위한 멤버들의 노력이 시작됐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아카데미즘의 규정과 영어의 관계를 논쟁화하고 있었다.

  49기 임인영 회장은 취임식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소리모아를 발행할 것과 Speech contest를 폐지하고 대신 심포지움을 개최할 것을 밝혔다. 당시 Speech Contest의 폐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나 회장단의 심포지움에 대한 집념과 몇몇 Staff(운영위원)들의 열정은 영어 서클의 상징인 Speech Contest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70 ~ 80 페이지의 소리모아가 매달 나오면서 Sapience의 위치가 애매해졌으며, 심포지움 동안 국가론, 사회구성체논쟁, 신 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집중 학습이 토론과 발표로 이어졌다. 50기에 이르러서 정규모임과 예비모임 때의 중복적이고 반복적인 text 토론에 대한 비판으로 정기 모임 때는 시사토론을 못 박았으며, 그것은 곧 Extra Meeting의 강화로 이어졌다. Key note를 우리말로 적고 그것을 다시 영작해서 Sapience에 실으면, 다시 해석해서 읽어야 하는 영어의 비효율성과 낭비에 대한 멤버들의 불만이 커졌으며, 결국 text 토론과 시사영어 토론이 분리되면 서 우리말 토론에 비중을 두는 상황이 벌어졌다. 4월 NASA-K meeting이 있자, Staff Meeting에서 만장일치로 NASA-K 탈퇴를 결정했으며 회장단이 공식적으로 T.S.S.의 의사를 전했다. 이로써 과거의 순응적이고 반민족적이던 올가미를 벗어 던짐으로써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결국 서클에서 개혁의 소용돌이는 멤버들의 의식을 변화시켰으며 신입생들의 사회화를 촉진시켰다. 89학번의 아카데미즘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비판, 서클 개혁 의지는 그들 내부에서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마침내 51기 겨울 캠프 lecture를 통해 조직축소와 함께 영어 폐지라는 합의를 도출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86부터 89까지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서클개혁 추진위원회가 52기와 함께 발족하고 6개월 동안 개혁의 시기와 구체적 방법, 대안 프로그램, 그리고 개헌까지를 의논한다. 구체적 방안을 모색함에 있어서 당시 Staff들과 의사 교환을 하여 마침내 대안과 개헌을 마련하였다. term말 공청회를 통해 2/3의 찬성으로 개헌이 확정되고 53기가 시작하면서 ‘T.S.S.’가 아닌 ‘사암’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 실린 약사는 사암의 탄생부터 52기에 있었던 제 9차 헌법 개정까지의 도정(道程) 이다. 또한 이 글은 65기까지 매거진에 실려 있던 ‘사암 약사’와 54기에 88학번 김성호 선배가 주간지 ‘생각하는 돌’에 3회에 걸쳐 연재했던 칼럼 ‘사암 약사’를 발췌하여 정리한 것임 을 밝혀 둔다. 현재에도 사암의 역사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아직 미기록된 53기 이후도 조만간 실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간략하나마 그 동안 사암이 걸어온 길을 반추해 보고 이를 통해서 사암인들이 사암의 본질을 이해하고 발전적인 서클의 모습을 담보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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